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메르 제국 (문단 편집) ==== [[자야바르만 7세]] ==== [[파일:fbaa8abbc13da4674a0a10cb9b85412e.jpg]] [[자야바르만 7세]]의 궁정. '''[[자야바르만 7세]]'''는 '''[[캄보디아]] 최고의 성군'''으로 꼽힐 정도로 위대한 군주였다. 참파 군대가 트리부바나디티야바르만을 죽이고 수도 야소다라푸라를 점령했을 당시 그는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였는데, 1178년 크메르인들을 이끌고 참파 군대를 야소다라푸라에서 몰아내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참파 군대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수도로 귀환한 자야바르만 7세는 수도의 파벌 싸움을 정리한 뒤 1181년 독자적으로 크메르 제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그 직후 참파의 재공격과 인근 소왕국들의 반란을 억누르면서 크메르 제국의 분열을 막는 데 최선을 다했다. 참파에게 수도 앙코르까지 빼앗겨본 기억을 잊지 않은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를 공격하는 데 진심이었다. 그는 1190년에 8년 전 크메르로 망명해온 참파 왕자 비드야난다라를 내세워 참파를 침공했다. 비드야난다라는 크메르의 도움을 받아 참파 군대를 격퇴하고, 수도 비자야를 함락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며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를 잡아 크메르로 압송해 끌고 왔다. 비드야난다라 왕자는 참파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반란으로 비자야에서 쫒겨나 크메르로 도망쳐왔다. 격노한 자야바르만 7세는 다시 군대를 보내 비자야를 다시 한번 함락시키고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와 그 후계자인 자야 인드라바르만 5세를 죽여버렸으며 1203년에는 참파 북부 전체를 아예 크메르 제국의 속령으로 편입했다. 크메르 제국의 참파 통치는 122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이후 크메르 제국의 국력이 점점 약화되자 파라메스바라바르만 2세가 참파의 재독립을 선포하면서 결국 18년만에 종결된다. 어쨌든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 대부분 동안 참파는 크메르 제국의 속국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저 멀리 북쪽으로는 [[태국]]의 [[비엔티안]], 남쪽으로는 크라 지협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현대 [[태국]] + [[라오스]] + [[캄보디아]]의 영토를 모두 합쳐놓은 것만한 거대한 영토의 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때를 '''크메르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하며 실제로도 국력과 문화는 이때가 최고 정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단순히 영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건설 프로젝트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국 곳곳에 102개가 넘는 [[병원]], 도로를 따라 만든 127개의 휴게소, 그리고 농업 생상력 증대에 필요한 저수지를 건설했으며 덕분에 유통 물산이 전국에 뚫리면서 크메르 제국의 인구 밀도는 급격히 높아졌다. 신비한 미소로 유명한 '''[[바이욘]] 사원'''이 이때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폐허로 유명한 '''타 프롬 사원''', 폐허도시 '''앙코르 톰''' 등이 모두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만들어졌다. 이 시절이 크메르 건축의 최고 전성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시기의 대표작인 바이욘 사원은 나라의 최고 중심이 되는 사원으로 무려 200여 개가 넘는 4면 인면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크메르 건축의 정점을 찍었으며, 앙코르 톰의 경우 철저한 계획도시로서 이전 크메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특히 1186년 자야바르만 7세의 모후를 위해 지어진 타 프롬 사원의 경우, 국사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는데, 전성기 시절에는 이 사원에만 18명의 대제사장과 615명의 여성 무희, 무려 80,000명이 넘는 유지 관리 인원이 배속되었을 정도였다. 거대한 나무 줄기가 폐허를 신비롭게 칭칭 휘감은 장면으로 유명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크메르 제국의 최고 황금기를 이끌었던 자야바르만 7세는 1218년 경, 37년의 재위기간 끝에 붕어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드라바르만 2세]]'''는 별 업적 없이 124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아버지를 닮아 불교도였던 인드라바르만 2세였기에 아버지가 미처 끝마치지 못한 불교 사원들을 모두 완공한 게 거의 유일한 업적일 정도이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자야바르만 7세에 다다르지 못했기에 인드라바르만 2세 재위기의 크메르 제국은 1220년 경 대월의 견제를 받아 참파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고, 서쪽에서는 속국으로 살던 [[태국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수코타이 왕국]]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수코타이 왕국은 200년 넘게 크메르 제국의 국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치열한 라이벌 경쟁전을 펼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